[백일출가] 그냥 한번 해보기 _ 20기 허순

백일출가 | 2017.02.26 15:11 | 조회 328

그냥 한번 해보기

허순 _ 20기 백일출가

 

 

농사 안내를 하며 내 성향을 알아차리다

문경 정토수련원에서 내가 맡은 소임은 백일 출가 행자들에게 농사일을 안내하는 역할이다하지만 나는 농사를 모른다아버지는 농촌지도소 공무원으로 30년 넘게 근무하셨고그런 아버지를 따라 주말에 간간이 거름주기농약치기가지치기파종하기김매기모내기수확하기 등 웬만한 농사일은 다 해봤지만 농사를 몰랐다일을 하되 주인된 마음으로 하지 않고 늘 아버지가 시키는 것만 수동적으로 해왔기에 농사일에 무지했다농사를 모르는 사람이 백일출가 행자들과 농사를 지어야 하니 처음엔 두려운 마음이 올라왔다큰일이다 싶으면서 한편으로는 뭐 어떻게 되겠지 하는방관하는 마음도 들었다.

행자들과 작물을 키우고 밭을 가꾼다는 것은 빨리많이 수확을 하는 데 목표를 두지 않는다농사를 짓는 데도 수행이 우선이다일을 이치에 맞게 연구하면서 조율하고자연에 감사하고함께 하는 이의 소중함을 배우는 시간이다.

행자들이 수행 관점을 놓치지 않고 일을 해 나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내 역할이다하지만 나는 성향 상 일만 보고 사람을 잘 살피지 못한다뭔가 하나에 집중하면 집요하게 파고드는 성격 탓에 일을 하다 한참 후 고개를 들면 행자들과 저만치 떨어져 있기 일쑤다그럴 때마다 아차내가 또 놓쳤구나’ 하며일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행자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살피기 시작한다그렇게 어리숙한 초보 농사 스태프 생활이 한 달쯤 지날 무렵하우스에 쌈 채소 재배를 위한 틀밭을 만들었다.할 일을 설명하고 각자 역할을 나누고 일을 시작했다대부분의 행자가 자기 일을 하고 있는데 한 행자가 남 눈치만 보는 것이 눈에 띄었다나는 수도배관 매설 작업을 같이 하자며 그를 불러 삽질을 요청했고그 행자는 일이 명확히 주어지니 매우 열심히 하였다그 후로도 그 행자는 일을 개괄적으로 설명하면 어떻게 할지 몰라 하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였다처음에는 일을 하기 싫어하나 오해도 했지만그럴 때마다 다가가 무엇이 문제인지 확인하고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일 방향을 잡고 해나갔다나중엔 오히려 자기 의견을 적극적으로 제안하기도 했다그 행자는 생각이 많아머릿속에 분명한 그림이 그려지지 않으면 시작을 못하는 편이었다남들보다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도구나 작업하는 방법을 보여주며 함께하니 태도가 훨씬 주체적으로 변했다또 어떤 행자는 미주알고주알 설명 듣는 것을 질색한다전체적인 틀만 이야기하면 스스로 부딪혀가며 방법을 찾아 재미를 느끼는 경우가 있다사람은 모두 다르다개개인의 특성에 맞추어 안내하고 소통하는 것이 필요하구나그러기 위해서는 나에게 매몰되지 않고 전체를 살피고내 잣대로 상대를 함부로 단정 짓지 않는 연습이 필요하다.

  

중간수련 중 27기 백일출가 행자님들과 함께 (맨 오른쪽이 필자)

 

명심문을 실천하며 경험을 확장시키다

일 수행이 끝난 후행자들의 나누기는 감동이었다포기의 순간, ‘이건 도저히 안 돼’ 하는 순간한계를 뛰어넘어본 경험은 에너지와 힘을 품고 있다. ‘안 된다는 것은 내 생각일 뿐 사실이 아니라는 것내가 긋고 있는 한계를 뚫고 나왔을 때 세상이 확장되는 그 시원함못 할 게 없다는 자신감이 샘솟는 행자의 얼굴을 보니 가슴속에서 뭉클한 뜨거움이 올라왔다기쁘고 감사했다.

행자들과 웃고 일하고 땀 흘리는 동안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내 성격도 조금씩 개선되어 감을 느낀다예전엔 남에게 부탁을 못 해서 혼자 끙끙거리며 힘들어 했는데요즘은 이것저것 요청도 잘한다.일이 되도록 하기 위해 내가 부족한 부분을 얼마든지 부탁할 수 있다여전히 안 해 보고 잘 못하는 일을 맡으면 두려움이 올라오지만이제 어떠한 역할이 주어져도 그냥 한번 해보지하는 여유도 생겼다백일출가 행자들과 함께 나 역시 방긋 웃으며 예~! 하고 합니다.”를 통해 내 세계를 확장시키고 있다이런 기회가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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