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6년 월간정토 5월호] 버리기와 바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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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일출가 | 2017.02.18 16:50 | 조회 183

    백일출가 23. 김민정

     

     

    버리기와 바라기

     

    매사 걱정과 근심이 많습니다.”

    2012년 여름, 희망 강연 때 법륜스님께 드렸던 질문이다. 그때 스님께서 주신 답변은 저는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편안합니다. 지금 이대로 좋습니다.”라는 기도문이었다. 그 후 나는 깨달음의 장을 다녀오고, 불교대학을 졸업하고, 얼마 뒤, 23기 백일출가로 문경수련원에 입재했다. 그리고 지금은 이곳 문경수련원에서 상근활동을 하며, 걱정과 근심이 많다는 것이 현재의 나를 인정하지 못하고 욕심 부리며 살고 있습니다.’ 라는 말과 같다는 것을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1학년까지 살았다. 지금 어릴 적 앨범을 봐도 예쁜 옷들을 입고, 뽀글뽀글 파마를 하고 마냥 행복하게 웃고 있다. 누가 봐도 남부러울 것 없는 부잣집 막내딸 같은 모습들이다. 그런 모습으로 심심치 않게 놀이공원이며 남산이며 맘껏 어린 시절을 누렸던 나의 어릴 적 모습들 뒤엔 세 들어 살고 있는 단칸방과 영업사원으로 밤낮없이 고생을 하는 아버지, 공장에서 일하는 어머니가 계셨다. 우리 남매에겐 치킨 몇 조각을 사다 먹이시고, 먹고 남긴 물렁뼈를 치킨대신 드시는 어머니와 그것도 양보하신 아버지가 계셨다. 그렇게 나의 어린 시절 서울의 기억은 부모님의 희생을 뒤로 한 채, 상처라고 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저 행복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광주로 이사를 왔다. 부모님께선 슈퍼를 운영하면서 아버지는 택시운전을 병행하셨다. 밤잠 못자고 운전하시고도 새벽이면 자고 있는 우리 남매가 깰까 조심조심 새벽에 장을 보러도 다니셨다. 그러면서도 택시영업이 쉬는 날이면 저녁에 가게를 마치고 우리를 데리고 시내로, 광주 무등산으로 많은 시간들을 함께 보내주셨다. 행복한 나날들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무렵에는 신기하기만 했던 새 아파트를 분양받아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 즈음 아버지가 쓰러지셨다. 처음 쓰러지셨던 것은 택시운전 중 기사식당에서 밥을 드시고 화장실에 가셨다가 혈압으로 쓰러지셨다고 했고, 얼마 후 다시 쓰러지셨고, 우리 남매는 작은아버지 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아버지는 뇌종양이라고 하셨다. 회생율이 20%밖에 안 되는 대수술에, 수술이 끝나도 마취가 풀릴지 알 수 없다고 했다. 작은 아버지, 어머니는 우리 남매가 부모님의 빈자리를 느끼지 못할 만큼 애써주셨다. 다행히 아버지의 수술은 기적적으로 대성공이었고, 얼마 후 우리는 다시 함께 살게 되었다. 어머니는 3교대로 일하는 공장을 다시 다니기 시작하셨고, 아버지 역시 다시 택시운전을 시작하셨다. 그렇게 헌신적인 부모님 덕에 나는 아무런 어려움 없이 중,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성인이 되어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는 나는 악착같이 돈에 집착했다. 친구들이 갖고 있는 비싼 가방, 옷 따위는 갖고 싶지 않았다. 빨리 돈을 많이 모아서 부모님을 편하게 해드리고 싶었다. 학교를 마치고 왔을 때도, 직장인이 되어 퇴근하고 왔을 때도, 잘 차려진 밥상과 가득가득 채워진 간식들.. 마음은 어딘가 늘 쓸쓸하고 미안했다. 우리가 잘 때, 밤새 서서 일하는 야간근무를 나가야하는 어머니의 뒷모습이 아프고 싫었다. 뇌수술로 이마 한쪽이 살짝 들어간 아버지가 밤을 꼬박 새며 운전을 하셔야 하는 것도 고통스러웠다. 나는 빨리 돈을 벌어야했다. 많이 모아야했다. 모든 것을 다 뒤집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렇게 고생하시며 20년간 무사고 운전을 하시고, 아버지가 그렇게 원하던 개인택시 면허를 받기 며칠 전, 아버지는 사고를 당하셨고, 상대는 음주운전이었다. 개인택시 면허는, 아버지의 20여년의 꿈은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아버지 괜찮아요. 모든 것을 내가 다 갚아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돈에 집착을 한다고 내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마음이 바쁘면 바쁠수록, 애를 쓰면 쓸수록, 나는 지쳐갔고, 걱정과 근심 속에 가슴엔 억울한 마음만 커져갔다. 가족을 위한다고 하는 일인데 가족들에게 서운함과 원망이 쌓여갔다.

     

     뭔가 이건 아니다 싶어 많은 고민 끝에 백일출가를 했다. 습으로 남은 내 욕심과 집착은 마음공부에도 그대로 옮겨졌다. ‘빨리!’ 괴로움 없이 자유로운 사람이 되고 싶었다. 옆에서 공부하고 있는 행자대학원 행자님들을 보면서, 내가 원하는 상태로의 고속도로 같은, ‘행자대학원으로 내 집착은 옮겨갔다. 행자대학원에 기웃거리다가 나는 정작 백일출가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고 백일출가를 마쳤다. 아쉬움에 수련원에 더 남아 공부해보기로 했지만, 막상 수련원에 있으면서는 안락한 집과 가족에 대한 집착으로 늘 밖을 기웃거렸고 막상 집에 가자니 수행에 대한 욕심으로 선뜻 이곳 생활을 포기하지 못하며 방황하는 시간이 계속되었다. 계를 지키지도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말하고 행동하며 수행과는 거리가 먼 생활, 이건 아니다 싶을 즘, ‘그렇지, 행자대학원!’하며 이 모든 것으로부터 나를 구해줄 것 같은 행자대학원에 다시 집착하기 시작했다. 행자대학원에 가겠다는 내 이야기를 듣던 행자반장님이 행자대학원은 얻으려고 가는 곳이 아니라, 내려놓기 위해 가는 곳이다. 지금은 행대를 안가는 게 낫겠다.’고 말씀하셨다. 충격이었다. ‘나도 내가 모자라는 거 안다고, 그래서 하겠다고..’ 온갖 생각이 올라오고 마음은 억울하고 복잡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고집을 부리면서도 스스로 뭔가 이상하다’, ‘뭔가 내가 잘못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할 무렵 상근자 수련을 가게 되었다.

     

     무변심 법사님과의 문답을 통해, 나 스스로가 보지 못했던 내 안의 깊고 얽힌 모순의 뿌리를 보았다. 나에게 행자대학원은 배우려는 목적이 아니라 가지고 싶은 타이틀일 뿐이라는 것과, 나에게 정작 중요한 것은 빨리가는 것보다 바른방향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서울에 빨리 가겠다며, 제주도 행 비행기 티켓을 끊는 어리석은 내 모습을 직면하는 순간이었다. 법사님은 놓아야 해요. 그게 가장 빠른 길이에요라며 거꾸로 가고 있던 나를 돌려 세우셨다. 보다 빨리, 보다 많이, !’ 로 가득했던 내 머릿속에 만족이란 없었다. 백일출가 때 그랬던 것처럼 이것을 하면서 저것에 기웃거리고, 이것을 가지고 있으면 저것을 가지고 싶어했다.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고 만족하지 못하는 삶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니 되는 일이 없었다. 마음은 늘 헐떡였고 행복하지 못했다. 이제는 알겠다. 그게 다 욕심때문이라는 것을.

     

     광주법당에 다닐 적에 묘당법사님께서 자기 인생 똑바로 사는 게 가장 큰 효도야라고 해주신 말씀의 의미를 이제야 알 것 같다. 부족한 대로 지금의 내 모습에 감사하고 만족하면 지금 이대로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묵묵히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며 최선을 다하며 사셨던 우리 부모님이야 말로 수행자이고 부처님이셨다. 살아계신 나의 부처님, 아버지, 어머니 사랑합니다. 그리고 존경합니다. 이제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 그 끝없는 은혜 갚겠습니다.

     

     

     

     

      
     (필자는 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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